체홉의 [갈매기]에서 드는 의문 I
니나가 뜨리고린과 약속을 하고, 모스크바로 가서 비밀스럽게 만나 살림을 차린다. 여기서 드는 의문!!
1) 과연 니나의 꿈이 배우였을까?
2) 니나는 뜨리고린을 진정 사랑했을까?
지성 가득한 니나가 어디까지 예측할 수 있었을까?
"모스크바에서의 뜨리고린은 결국 아르까지나를 걷어 차고 니나 자신을 선택할 것이고, 이후 보란듯이 유명배우가 되어 뜨리고린의 작품을 통해 성공을 맛본다." {완전 희망사항}
"니나는 모스크바에서 아기를 낳고 얼마 후 그 아기는 사망한다. 결국 아르까지나가 동거 사실을 알게 되고, 추궁 끝에 뜨리고린은 가차없이 니나를 저버린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니나는 이류 배우가 되어 연극(지방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현실사항}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을 이해해야 한다.
아르까지나의 배우 수입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그녀의 재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뜨리고린의 작가 수입 역시 하찮다. 사실 아르까지나는 뜨리고린의 스폰서다. 아르까지나의 지원이 없으면 쪽도 못쓰는 가난뱅이 작가일 뿐이다. 그가 입는 값비싼 외투나 마차나 파티 등의 사치스런 풍요는 모두 아르까지나로부터 제공받아 왔다.
과연 니나의 꿈은 배우였을까?
'모스크바에서의 멋진 삶' 자체가 니나의 꿈이 아니었을까? 니나가 갈매기를 꿈꿨다면 모스크바를 향해 훨훨 날라가기 위해서였을 거다. 배우는 덤이고!!
니나의 친모가 죽을 때 왜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아버지에게 맡겼을까? 아버지는 또 왜 니나에게 줘야 할 유산을 후처에게 줘버렸을까?
니나가 만일 친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성인이 되자마자 모스크바로 튀었을 거다. 당시 귀족들은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딸이 배우하는 걸 좋아할 귀족은 참 드문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르까지나는?
말그대로 유산이 있었기에 지멋대로 산 귀족여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심지어 평민(꼬스차의 부친)과 결혼했으니 더할 나위없이 가족의 지탄을 받았을 테지! 배우로 성공했고, 여전히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기에 선망의 대상으로 살고 있는 거다.
소린의 유산과 수입은 결코 아르까지나에 비해 적지 않았다. 오히려 많았겠지! 헌데 지금은 영지 외에 현금이 왜 없을까? 대본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소설들을 참고하면 소린은 노름으로 다 탕진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니나는 과연 뜨리고린을 진정 사랑했을까?
난 아니었다고 본다. 동경하고 존경했겠지만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모순이 많다.
우선 뜨레블레프(꼬스차)와의 만남부터 의심해야 한다.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니나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아르까지나의 아들인 꼬스차다. 그의 작품을 통해 아르까지나의 인정을 받는 것!! 헌데 공연날 모자는 딥다 다툰다. 연극을 통해 모스크바를 가려던 희망이 무너지자 곧바로 전략을 바꾼다. "뜨리고린을 꼬시자!!!"
결국 성공했잖아?!! 아기가 죽지 않았다면 한참을 더 버텼을 테지만, 여전히 배우 활동은 불가능했을 거다. 앞서 말한대로 뜨리고린이 아르까지나를 차버리고 니나를 선택했다면 그나마 가능했을까나???
체홉은 왜 갈매기를 코미디라고 주장했을까?
니나는 속물의 대명사다. 애인을 버리고, 애인의 어머니인 아르까지나의 애인까지 낚아 챈 정말 밥맛 떨어지는 여자다.
단지 체홉은 4막 후반부에서 니나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든다. 자신이 틀렸음을 진지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귀족들 웬만해서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체홉은 귀족의 그 위선들을 엄청 혐오했다.)
"꼬스짜! 기억해?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선명하고, 포근하고, 유쾌하고, 순결한 삶이었는지..."
그리고 2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한토시도 틀리지 않고 대사들을 읊어 댄다. 대사를 멈추고 꼬스짜를 격정적으로 껴안는다. 그리고 사라진다.
니나는 당시 불편하게 여겨졌던 표현주의 연극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는지 깨달았던 거다.
그리고 꼬스짜와 함께 했던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었음을 고백한 거고!!!
꼬스짜는 가슴이 터질 듯 행복했을 거다. 니나와 자신과 나누었던 시간이 진실이었다는 사실과 작품까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그를 충분히 자살로 이끌 수 있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선택하는 자살!!!!
그래서 체홉은 죽자살자 <갈매기>가 코미디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Happy ending!!
이 해석이 얼마나 예상을 벗어나는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슬슬 까놓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제 내 나이도 60을 훌쩍 넘겼고, 2,30대 때 <갈매기>를 보며 들었던 의문들도 얼추 풀었기에 더이상 조심스러워지기 싫다. 그저 한 번 읽고 "내 생각과 다르군!"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체홉의 [갈매기]에서 드는 의문 II
유튜브의 보편화 덕에 많은 [갈매기] 공연들을 어렵잖게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인물(Character)을 중심으로 체크했는데, 공통점이 여럿 발견된다.
1) 마샤는 기본적으로 어둡게 그린다.
2) 메드벤젠코는 어리숙하고 바보같다.
3) 샤무라예프는 다혈질이다.
오늘은 이 세 인물을 다뤄볼까 싶다.
1) 마샤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다. 소린의 영지 관리인의 딸이고, 교육은 귀족만큼은 아니지만 적잖은 문학 소양을 갖추었다. 시대상 이런 계급의 여성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신분상승을 꿈꾼다. [세자매]의 나타샤처럼 그녀도 귀족과의 결혼을 희구한다.
마샤가 입은 검정색 드레스가 과연 상복의 의미를 가질까? 전혀 착각이다. 그녀는 검정색 옷이 자신의 몸매를 받쳐 준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짝사랑의 대상인 뜨레블레프의 공연날이니만큼 옷장의 옷들 중 가장 이쁜 옷을 선택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친절하고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를 쓸 것이다. 사람들이 칙칙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단지 니나의 경쾌하고 세련된 모습과 비교되기에 문제가 발생할 뿐이다.
마샤는 일반적으로 매력적이고, 나름 강단이 있다. 객관적이기도 하다. 단지 작품의 진행상 그녀의 단점이 드러나야하기에 그리 보일 수 있는 거겠지만 결코 칙칙한 여자는 아니다.
2) 메드벤젠코
그는 수학 선생이다. 23루블(40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많은 식구들을 건사해야 하기에 빡빡한 삶을 살고 있을 뿐 결코 가난뱅이는 아니다. 반면 마샤는 상대적으로 부유하다. 마샤와의 결혼이 메드벤젠코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결과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매력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꼬시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이게 메드벤젠코의 인물목표가 되어야 한다.
매순간 노력하고 지성을 뽐내고 경쾌하게 행동할 것이다. 결과는 헛발짓의 반복이지만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고, 데미지를 거의 받지 않는 불굴의 사나이다. 그렇게 그려져야 한다. 그래야 체홉의 의도와 맞닿을 수 있다.
3) 샤무라예프
그는 19세기말 대표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인물이다. 아마 소린보다 더 많은 현금성 부를 누리고 있을 거다. 영지 관리인인 샤무라예프와 지주인 소린과의 관계는 계약으로 이루어졌을 확률이 높다. 수확물을 5:5로 나눌 지 4:6으로 나눌 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수익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일 거다. 그게 그 유명한 아르까지나의 외출용 말 사건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매우 화를 내며) 그러시다면 전 그만 두겠습니다. 다른 지배인을 구하세요!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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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른 : 답답한 사람들. 사실, 당신 남편만 내쫒으면 되는 일인데, 저 늙은 여편네같은 뾰뜨르 니꼴라예비치(소린)와 그 누이동생(아르까지나)이 그 사람에게 사과하는 걸로 끝날 거요. 두고 봐요!
샤무라예프는 화내기 전 최선을 다해서 존경심을 표하며 아르까지나에게 양해를 구했을 거다. 헌데 여전히 그녀는 자기의 입장만 내세웠을 거고!! 그렇게 예의를 갖춰 부탁했건만 개무시를 당한 기분이었을 거다. 해결책은 소린에게 있었다. "내 수익을 줄이겠네!"라던지 "내가 비용을 치르겠네!"했으면 끝날 일을 교묘하게 샤무라예프가 퇴장한 후에나 막 소리친다. "늙은 여편네같은..."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여우같은..."이다.
당시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처럼 살고 싶었다. 귀족과 그들의 차이는 파티 열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귀족은 항상 오픈하고, 부르주아는 평상시에는 가구들을 천으로 덮어뒀다가 파티할 때만 오픈한다.
[세자매]의 나타샤는 주로 악녀로 해석하는데, 전혀 착각이다. 그녀는 노름빚으로 사라질 저택을 가까스로 지켜냈고, 기어코 남편을 출세시켰다. 그녀가 프로토포포프 시의장과 간통을 했다는 사실은 뒷담화에서 나온 말 밖에 없는데도 마치 몸을 팔아 남편을 출세시킨 악녀로 해석한다. 또 파티를 막은 이유 역시 집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었다면 이미 이 저택도 날라갔을 거다. 소린의 영지 역시 사무라예프의 강단이 아니었다면 언제 날라갔을 지 모를 일이다.
벚꽃동산의 영지는 결국 날라갔다. 샤무라예프나 나타샤같은 강단있는 지배인 혹은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체홉의 입장에서는 귀족이 주인공이 될 확률은 한 개도 없다.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귀족은 모두 패러디의 대상일 따름이다. 딱 두 명만 빼고!!
반성하는 '니나'와 [벚꽃동산]의 '아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