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아녜요, 아녜요...... 나오지 말아요, 저 혼자 가겠어요...... 제 마차가 근처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그 분을 데려 오신 거죠? 어떻든, 상관없어요. 뜨리고린을 보더라도, 아무 말 하지 마세요......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전 보다 더 사랑하고 있어요...... 단편 소재의 소재죠...... 사랑해요, 사랑해요, 열렬히,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어요. (☆1)
예전에는 좋았어요, 꼬쓰짜! 기억해요? 얼마나 선명하고, 포근하고, 유쾌하고, 순결한 삶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 부드럽고 우아한 꽃 같은 느낌이었죠......기억나죠?... (☆2)
(읊는다) “인간, 사자, 독수리, 뇌조, 뿔 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 불가사리,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한 마디로, 모든 생명, 모든 생명,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졌다...... 지구 위에서 생명체들이 사라져 버린지 벌써 수천 세기가 되었건만, 저 가엾는 달은 밤마다 부질없이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 이미 초원에선 학들이 울면서 잠을 깨는 일도 없고, 보리수 숲에서는 5월의 딱정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니나, 격정적으로 뜨레쁠레프를 껴안은 다음, 유리문 밖으로 달려 나간다} (☆3)
[뜨레쁠레프] (사이) 누군가 정원에서 그녀를 보고, 어머니께 말하면, 안 되는데. 어머니가 화내실 거야...
{2분간, 말없이 자기 원고를 모두 찢어 책상 밑에 버리고는, 오른쪽 문으로 퇴장}(☆4)
갈매기 라스트 장면에 대한 오류? 편견?
니나의 뜨리고린에 대한 "사랑한다. 전보다 더 사랑한다"라는 대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 뜨레쁠레프 앞에서 어떻게 얘기해? 니나가 뜨리고린의 방문을 알았을 리는 0.1%도 없었다. 니나는 뜨레쁠레프를 만나 고백하기 위해 닷새 전에 이 곳(도시)을 찾았고, 오늘 드디어 용기를 내어 꼬스짜의 공간에 들어온 것이다.
(☆2) 대사는 2년 전, 꼬스짜와의 시간에 대한 행복했던 자신의 감정을 함축해서 표현한 문장들이다. "선명하고, 포근하고, 유쾌하고, 순결한... 부드럽고 우아한 꽃 같은 느낌..."
(☆3) 그리고 이어지는 "인간 사자 독수리..."
긴 대사 후, {니나, 격정적으로 뜨레쁠레프를 껴안는다}
도대체 뜨리고린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오히려 분노 쪽 아닌가? 배신감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일 거다. 헌데 불과 2년 전 자신이 꼬스짜에게 준 엄청난 배신(꼬스짜를 버리고 그의 엄마 애인을 가로챈)을 스스로 기억하지 못할 무지랭이는 아니지 않는가? 버림받은 후 깨달음의 시간을 가진 후 꼬스짜에게 고백하려 했지만 자신의 만행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닷새 전 이 도시에 와서 무대 즉 꼬스짜의 공간까지 매일같이 찾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메드벤젠코와의 만남) 어제 무대에서 실컷 울고는 오늘 드디어 꼬스짜를 찾은 것이다. {이 자세한 내용은 4막 도른과 꼬스짜의 대화에서 아주 상세히 제시해 놓았다}
니나가 읊조린 꼬스짜의 상징주의 작품은 2년이 채 못되어 문단의 인정을 받는다. 니나 역시 꼬스짜의 작품이 가치있음을 깨달았단 얘기다. 2년이 지나고서도 한토시 틀림이 없이 외울 수 있었다는 건 어느 순간부터 다시금 계속해서 읊조렸다는 얘기고.
뜨레쁠레프의 죽음에 대해서
과연 꼬스짜가 니나에게 바란 건 무엇이었을까?
결혼해서 함께 살자? 니나가 그걸 받아들일 확률은 거의 제로다. 싫어서가 아니라 니나의 양심 때문이다. 그걸 모를 꼬스짜가 아니다.
- 2년 전 나눈 사랑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뜨리고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와의 밀애밖에 없었다고 판단한 니나의 행동을 확인함으로서 숫놈의 본능적인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다는 얘기다.
- 니나의 고백을 통해서 당시의 사랑이 진심이었다는 확인이 된 순간, 니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2년 전 자신의 작품이 한 토시도 틀리지 않고 전개된다. 과연 꼬스짜의 기분이 어땠을까?!! 더군다나 와락 껴안았다지 않았는가?!! 비극적인 자살일 수는 결코 없다. 행복한 순간에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 체홉은 유독 [갈매기]와 [벚꽃동산]에 대해 심하게 코미디 작품임을 강조했다. 현대 이전의 비극과 희극의 1차적 분류 기준은 비극적인 결말이냐 해피엔딩이냐에 달려 있었다. [갈매기]의 주인공은 니나와 뜨레쁠레프였고 그 둘은 이제야 진실을 깨달았기에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벚꽂동산]의 주인공은 로빠힌과 뜨로피모프 그리고 아냐다. 체홉의 마지막 단편소설 [약혼녀]를 읽어 보면 이해가 될 거다. 체홉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도 대략 추측했을 것이다. 미래의 러시아는 로빠힌과 같은 <부르주아>와 뜨로피모프같은 <인텔리전트>와 아냐같은 <깨인 귀족>들과 힘을 모아 새시대를 열기 바랬다. 그랬기에 과거의 산물인 라네프스까야를 비롯한 귀족들을 심하게 패러디했고 바랴와 피르스조차 그 결론에 포함시킨다.
체홉의 눈으로 체홉의 심정으로 [벚꽃동산]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체홉은 청소년기부터 귀족들에 대해 혐오감을 품고 살았다. 특히 둘째형 니콜라이의 사망 후 그 험난한 사할린 여행 감행하고, 돌아와 그 유명한 [6호실]을 발표한다. 이후 그의 혐오감은 몇몇 단편소설과 희곡 속에 차곡차곡 심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독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간과하거나 체홉의 귀족에 대한 혐오감을 인지 못한 채 읽어 나간다. 특히 귀족들이 자기 변론이나 자기 합리화하는 유려한 대사들에 속절없이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