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의 시대, 그 오류들에 대해서
1. 삼일치법(행동의 일치/시간의 일치/장소의 일치)
프랑스의 신고전주의에서 흔히 기준으로 삼은 삼일치법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한 오류다. [시학]에는 오직 'Unity of Action'만이 제시되어 있다.
당시 프랑스의 한 학자가 이탈리아로 유학가서 [시학]을 접했나 본데, 귀국하여 멋부린답시고 삼일치로 표명하고 이는 그리스시대의 연극 법칙이었다고 구라깐 거임.
2. 연극의 4요소라니?
모두들 아시다시피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다. 헌데 갑자기 무대가 더해지더니 {연극의 4요소}도 맞는 답이다라고 sns에 떠돈다. 이건 명확한 오류다. 여기서 말하는 무대는 조명이나 음향장비나 무대장치 등이 포함된 극장시스템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앞서 제기한 3일치법과 같은 오류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극장은 수많은 연극 공간 중의 일부다. 버스킹을 어찌 설명할 것이며, 마당놀이를 또한 어찌 설명할 것인가? 밤하늘의 불꽃축제나 드론의 파티가 미래의 연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메타버스의 미래도 다르지 않다. 거리의 악사나 만담가들이나 마술사들이 극장에서 공연하란 법이 어디 있는가? 관객이 모이고 배우가 이야기(희곡)를 펼치면 그 공간이 무대이거늘.... 무대가 필수 요소로 지정되는 순간, 과거의 수많은 연극들이 부정 당하고, 미래의 연극 개념이 한정되어짐을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3. 꼬스짜의 죽음을 비극적 결말로 보는 오류
체홉은 강하게 주장했다. [갈매기]는 코미디라고!! 나의 주장은 언제나 확고하다. 해피엔딩이 아니라면 체홉이 이를 코미디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비극과 희극이 어찌 구분되는가? [베니스 상인]에서 머 그리 킥킥될 코미디 문법이 있을라나? [십이야] [한여름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뜻대로 하세요]는 모두 해피엔딩이다. 반면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는 모두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물론 현대로 오면 코미디 문법으로 비극적 결말을 내는 경우가 꽤 형성된다. 학자들은 이를 희비극이라 명명하기도 하지만 그건 작가의 입장이 아니다. 작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었는데, 평론가들이 비극적 결말로 평가하는 오류는 허다하다. 열린 결말에 감히 족쇄를 씌우는 경우다.
어쨌든 난 [갈매기]를 열린 결말로 보진 않는다. 체홉의 입장에서는 니나를 반성하는 귀족으로 그렸고, 꼬스짜 역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게 해주었기에 이는 분명 해피엔딩인 것이다. 꼬스짜가 왜 자살 했냐고? 지금 죽지 않는다면 그 다음날부터 무슨 낙으로 살 건가? 니나와의 재결합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뜨레쁠레프 정도의 지식인이 알지 못했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