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운 대사를 '말'로 만든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뇌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말'은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입력되어 있던 수많은 단어들이 순간순간 조합되어 나가는 무의식적 기작일 따름이다.
대사는 작가의 의도대로 쓰여진 문장이다. 결국 외워야만 되고 그걸 말로 바꿔야 되는 게 연긴데.....
누구한테 얘기할 때 문장을 외운대로 할 리는 없잖아? 그러니 외운 대사가 '말'이 될 리는 없다.
헌데
많은 선생들과 선배들이 "말을 해!" 그런다.
즉흥으로 만든 말도 외우면 대사가 된다.
수없이 반복되던 즉흥연기 메카니즘도 공연에 임하면 결국 대사가 되고 약간씩 바꿔본다 한들 얘기의 맥을 잇기 위해서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의식은 0.1초의 기작이고
무의식은 0.02초의 기작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은 0.02초만에 떠올리고 조합해나가는 과정인 반면
연기는 아무리 빨라야 0.1초의 뇌속도란 얘기다.
외운 대사로 0.1초의 벽을 뚫어 0.02초에 다다르면 스타가 되는 건 따논 당상일텐데....
문제는 0.02초의 기작으로 대사를 구사하면 거짓말할 때 발생하는 호르몬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이다.
존나 부끄럽고 심장이 콩탁된다. 몇마디면 몰라도 계속 지속해야하는 게 연긴데.... 지속되는 만큼 거짓말의 길이는 점차 늘어나는 셈이니 완벽하게 연기하는 배우라면 거의 악마 수준이랄 수밖에 없으리라.
애초에 "연기는 거짓말이다"라고 가르쳤다면...
"연기는 진실해야 돼!"
"감정을 가지고 진실되게~"
"진심이 담겨 있지 않잖아!!!"
우리는 이렇게 배워왔고 이래야 연기 느는 줄 알았다.
"얘를 속여! 얘를 당황시켜!"
"그래가지고 관객이 속겠어?"
이런 멘트로 애초 출발했었다면 그나마 확률이 높았을텐데....
헌데 늦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연기는 감정가지고 하는 거다. 진실이다. 따위의 코멘트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즉 뇌에 강력하게 입력되어버린 탓에 무슨 멋진 코멘트를 날려도 시냅스의 연결고리들이 바뀔 확률은 없다. 새로운 길을 따로 내지 않는 한....
'왼손으로 글쓰기' '뒤로 걷기'처럼 뇌에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이미 생성된 시냅스 경로로는 외운 대사를 말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새로운 경로를 따로 만든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오른팔이 사고로 잘렸다고 치자. 왼손을 끊임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 오른손 쓰듯이 능수능란해질 거다. 이때 뇌는 새로운 길을 만든 셈이다.
150년 전까지 의사는 손을 씻지 않고 수술에 임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존재를 확인할 만한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씻고 수술에 임하라고 경고한 제멜바이스를 정신병원에 가뒀을 정도였으니.... ㅠㅠ
한번 인이 콱 밖힌 생각은 좀체 바뀌어지지 않는다.
이 원리가 명확하게 와 닿는다면 믿어진다면.... 뇌에 새로운 길을 내라.
외운 대사를 말로 바꾸는 일은
매번 무지 부끄럽고
길어지면 죽고싶을 정도고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까지 치다른다.
아마 이 메카니즘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다면
90%정도는 배우라는 직업을 단념하지 않을까싶다.
말이 안되도 먹고 사는 배우들이 허다하다보니 그럴 일은 안 생기겠지만, 최고수를 꿈꾼다든지 연기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진 배우라면 고민에 빠질 만한 내용이기는 하다.
나문희!!! 대사를 말로 하시는 정말 드문 배우다.
인물구축이나 분석력도 월등하시고 특히 지치지 않는 열정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