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 ???
대사를 열심히 숙지하고 입에 붙여서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다. 흔히 말하는 ‘연기한다.’이다.
“좀체 말 같지가 않다.” “연기가 안 된다.” 이런 평가를 듣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말 같고, 어떻게 해야 연기를 잘하는 거야?
배우라면 누구나 겪었을 과정이고 아마 지금도 겪고 있을 확률이 높다.
사실 말이 되면 연기 못한다는 소리 듣기 힘들다.
볼륨이 부족해서 전달력이 약해 보일지언정 고수들이라면 “재능이 있군.”이라는 판단을 어렵잖게 내린다. 말이 되는 건 타고난 것처럼 보이고, 볼륨은 훈련해서 터득될 확률이 높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헌데 과연 말이 되는 친구들은 타고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흔히 접해왔던 메소드 즉흥연기나 러시아의 에쭈뜨 등의 훈련들은 대사를 말로 인식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이 반복되는 이유는 ‘대사는 말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연극영화학과에서 이 수업들 대개 한두 번 이상씩은 듣기 마련이다. 그 중에 일부는 성공을 했을 것이고, 실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 이유를 좀체 눈치 채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의 차이점
말이 된다는 건, 순간순간 대사(말)를 떠올렸다는 것이고
말이 안 된다는 건, 매순간 (나도 모르게) 다음 대사를 준비한다는 얘기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다음 말을 떠올렸다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상대나 관객이 느낄 때, 지금 이 순간 떠올려서 한 대사로 여겨지면 말이 된 거란 얘기다.
헌데 이게 정말 어렵다.
자신은 그리 했다 여기지만 상대나 관객이 그리 느끼지 못했다면 말이 된 게 아니다.
여기서 갈등이 시작된다. 난 말을 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지?
뇌가 그렇다.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게 뇌다.
간단한 훈련법
“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뭔데?)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꼭 그렇게 얘기해야 했어?.....”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런 거짓말 정도는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어차피 연기 훈련인데 뭐!!!
한토시도 안 틀리게 해야 한다는 게 관건이다. 일단 말을 글로 써라. 문장으로 만들고 단 한 토시도 안 틀리게 외워버려야 한다. 이 정도 길이를 소화해 낼 수 있다면 대사를 말로 바꿀 능력이 확보된 셈이다. 한번이 아니라 10번 쯤 시도해서 50%는 성공해야만 그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서너 번 넘어가면 무지 부끄러울 거다.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이 들 정도 일 거다. 상대가 눈치를 채면 실패한 거다. 성공한 횟수만 따져서 10번이면 거의 악마 수준이다. 원래 배우란 ‘악마성’을 담보로 삼는 거니까 ㅠㅠ.
만일 성공했으면, 길이를 조금만 더 늘려라. 한 두 문장만 더 늘려도 부끄러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는다.
대사를 말로 인식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뇌를 속여야 한다는 얘기다.
뇌가 자신을 속이듯이 스스로도 뇌를 속여야 한다.
뇌 안에는 각기 다른 인격체들이 존재한다.
거짓말을 못하게 하는 시냅스의 길과 지금 이건 ‘연기연습이야’ 하는 시냅스의 길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 번 성공시키면 거짓말 못하게 하는 기작이 수긍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긍해도 몇 주 후면 또 방해한다. 입력된 기간이 엄청 길기 때문에 DNA는 그리 쉽게 단념하지 않는다. “거짓말하면 안 돼!!!”라는 입력은 최소한 20만년간은 지속되었을 거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면 결국은 뇌도 단념한다. “거짓말이 필요한 시대인가 보지.”하고 문을 열어 준다. 연기는 야금야금 늘지 않는다. 순식간에 팍 는다. 뇌의 억제성이 단념하는 순간이다.
일단은 시도 해 봤으면 싶다. 기분을 맛보면 효율적인 연습을 터득하게 될 확률이 높다. 해도해도 늘지 않는 답답함보다는 부끄럽고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싸~한 기분이겠지만 큰 맘 먹고 시도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상대가 속을 만한 문장을 잘 구성해야 하고
완전히 외워서 한토시도 바꾸지 않아야 한다.
대사만 바꾸지 말라했다. 음이나 호흡은 끊임없이 바뀌게 되어 있다. 순간 판단에 따라라.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지 꼭 겪어보길 바란다. 내 속의 또 다른 나, 즉 또 다른 인격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참고로
난 21살 서울예대 재학 시, <버드베스>라는 작품의 대사로 5명의 여자들에게 시도를 했고 모두 성공시켰다(80년 남산다방에서 하루만에).
세 번째 시도 즈음에 가서는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덕분에 영화나 방송의 주조연을 따내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당신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여자들은 말야, 거의 모두 남자들의 시간과 관심을 송두리 채 빼앗아 버리고 말지. 물론 이해한다고 말은 해.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그만 아연질색을 하고 말거든. 그럼 어떻게 하는지 알아?......”
Bird bath, 프랭키의 대사 중에서
당시에는 이 능력이 날 배우로 만들 것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20번의 오디션에서 거의 떨어진 적이 없었다. 연극연출이 내겐 훨씬 즐거웠던 일이었기에 배우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값비싼 알바로 극단 유지에 큰 힘을 보탠 건 분명하다. CF모델로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연예인들 연기 사사를 하면서 극단 운영비를 꽤 마련했었거든.
구글에서 내 과거 CF영상이나 포스터들이 의외로 많이 검색되었다. ㅎㅎㅎ
특히 매취순 포스터는 전국의 횟집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