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도래할 Acting Science에 관하여
"어떻게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는가?"보다는 "왜 연기가 어려운가?" 혹은 "연기가 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위의 현상을 과학적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중이다.
15년 전에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인용해서 설명하곤 했는데, 10년 전부터는 진화학과 뇌과학으로 납득시키고 있다.
호모사피언스를 기준으로 삼아도 대략 30만년이다. 인류는 이 기간 대부분을 수렵채집 형태의 삶을 살았다. 부족은 혈연관계로 꾸려졌고, 거짓말쟁이는 쫒겨날 확률이 높았다. 쫒겨나면 살아남을 확률은 분명 낮았을 테고. 거짓말 DNA가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지만 오랫동안 억제되었음은 분명하다.
도시화가 이루어졌을 즈음에나 거짓말 DNA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스물스물 발현되었을 거다. 30만년은 정말 어마무시한 기간이다. 거짓말을 하면 심하게 두근거리고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DNA들이 생존에 유리했을 거라 확신한다.
인류역사 끄트머리에 간빙기가 도래했고 도시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이후 세월이 흘러 연극이 탄생하고 또 세월이 흘러 리얼리즘이 탄생하면서 오늘날의 리얼연기시대가 펼쳐진 거다. 리얼연기는 진짜 거짓이어야 관객이나 시청자의 호응을 얻기 마련이다. 도박으로 빚을 졌을 경우에나 가능했던 거짓말이 예술이라는 포장 아래 합법화가 된 셈이다.
무대에서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의 속삭임이 가능하고 절친에게도 분노의 화살을 날릴 수 있다. 헌데 과학적인 근거를 대기 어려웠던 시기에 출현한 화술법은 온통 추상적이고 미사여구로 일관했다. 연기는 진실해야 하고, 정서가 중요하다 따위의 표현들이다. 실감나는 거짓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해왔다면 작금의 혼란은 꽤 줄어들었을 텐데....
듣고 말하기/대상/Diction은 모두 같은 말이다
배우는 대본을 읽고 분석한 후 외우는 과정을 거친다. 일단 외워지면 죽자살자 말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인물분석을 통한 톤과 리듬의 연구 따위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결론은 말이 되어야 한다.
외운 대사를 말로 구사하는 배우들은 의외로 드물다. 몇 마디까지는 그럴싸하지만 길이가 생기면 헛점들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얘기가 쌓이지 않는 경우다. 거짓말쟁이들은 자신이 앞서 한 말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목적을 달성한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억양과 감정이나 뉘앙스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관객들은 대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인물이 떠벌린 Action을 따라가고 있다. 의미들을 쫒아간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리숙한 배우들은 대사를 내뱉으면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감정이 심하게 동반되었다면 그 착각은 절정에 다다른다.
제압해야 하는데 무작정 화를 내고 있다든지, 황당한 상황인데도 분노의 목소리로 커버한다든지, 죽음의 순간에 처해있는데 끊임없이 절규만 하고 있다.
죽음을 예감하면 인간의 뇌는 살기 위해서 각성된다. 즉 차가워진다는 얘기다. 황당하거나 기가 막히면 말문이 막히는 호흡을 동반하게 되고, 상대를 제압하려면 논리적으로 전환된다. 제압하는 소리와 화를 내는 소리는 엄격히 다르다.
대사를 말로 전환시킨다는 이치는 리얼의 법칙이다. 관찰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나 자신도 관찰해야 하고, 격한 상황에 처했을 때 특히 그래야 한다. 몰래카메라 때 속이듯이 진짜로 남을 속이는게 가능하다면 리얼연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단지 연기는 조건들이 여럿 첨부되기에 낯선 것 뿐이다.
Diction의 원칙
-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 문장이나 단어들을 그 순간 떠올려야 한다.
- 내 대사 마지막 부분의 음과 뉘앙스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양궁선수들의 훈련과 안세영의 셔틀콕을 상상해 보자. 남기고 또 남기는 훈련의 목적은 즉흥이다. 그 순간 순간의 판단만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게 만든다. 물론 분석하고 연구하고 자세를 교정하고 체력을 기른다. 이 모든 것은 시합 당시의 즉흥적인 판단을 전제로 삼는다. 연극이나 드라마는 약속들로 이루어지지만 연기는 금메달 따기와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판단만이 판가름을 낸다. 순간 떠올린 소리와 준비된 대사와의 뉘앙스는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상을 증명하고 원인들을 제공한다. 허나 받아 들이는 이는 늘 적은 투자에 큰 효과를 바라는 침팬지의 본능에 충실하기에 감상으로 일관한다. 절벽에 서거나 원래 연기는 1만시간의 투자가 기본이라는 전제를 깔지 않는 한 Diction은 해결될 확률이 없다.
Diction은 하루에 해결해야 한다. 짧은 문장이라도 당일 맛을 봐야 한다. 쉬는 시간 다 빼고 8시간만에 서너문장을 완전 순간 떠올리기로 성공시킨 동영상을 확보한다면 승산은 있다. 그 사이 20번은 단념하고 싶었을 거고, 서너번은 좌절할 테고, 한번 정도는 연기를 때려치고 싶은 게 정상이다.
해결하는 뇌의 길을 새로이 내야 한다. 즉 해결할 때 구축되는 시냅스의 연결고리에 미엘린*이 두툼하게 씌어지는 현상이다. 0.08초의 반응 속도가 가능해지는 두께를 만들면 즉흥이 가능해지고, 타고난 배우처럼 보인다.
언젠가 자신의 뇌를 주시하면서 훈련하는 장이 마련될 것이다. 이 때 수업명은 [과학연기]든지, [뇌과학과 연기] 따위의 제목이 붙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