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배우
7,80년대에는 연극배우가 영화나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살짝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타협한다고 인식되었나 보다. 속마음은 그러지 않았을 거다.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텐데 매체가 싫을 리 있었겠나 싶다. 어쨌든 당시 그런 인식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했다.
40년 전 배우들은 쪼가 많이 심했다. 대신 밀도가 꽤 높았다. 볼펜 물고 딕션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보편적이었을 정도니 잘 만든 연극의 경우엔 집중도가 상당했다. 반면 요즘 젊은배우들은 말들이 편하고 맛깔스럽다. 헌데 밀도가 떨어진다. 차이가 뭘까?
'듣고 말하기'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대략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그 어떤 때라고 본다. 나야 메소드 연기로 무장한 미국 유학파 교수들이 잔뜩 모여 있었던 80년도 서울예대 재학생이었으니 그 표현을 귀에 박히도록 들어 왔다. 그랬기에 매체연기와 연극연기가 차이 날 리 없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헌데 당시 영상매체에서는 연극배우를 꺼려했다. 연극적인 대사투가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듣고 말하기
신구 전무송 박정자 기주봉 등 원로 배우들 대부분이 연극판에서 수십년간을 뼈를 갈았다. 최민식 박해일 황정민 김윤식 류승룡 이정은 등 A급 배우들 역시 연극무대에서 오랜 시간 형편없는 개런티를 받으면서도 결코 열정을 잃지 않았었다.
그들의 대사가 불편할 리는 없다. 연극무대에서 십수년을 경험했는데도 왜 쪼가 없을까? 있었는데 극복했을 수도 있고, 착각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그 무엇일 수도 있다. 특히 공간의 차이에서 오는 발성법에서 착각을 일으켰을 확률을 배제할 순 없다.
성능 좋은 마이크에 대고 하는 대사와 대극장에서 객석 끝 관객에게까지 전달시키는 대사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극장의 경우, 울림도 확대해야 하고, 제스추어도 과장되어야 한다. 소극장 역시 마이크 앞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요한 건 '듣고 말하기'였다.
action-reaction
'듣고 말하기'는 서양 개념으로는 'Action-Reaction'에 가깝다. 외운 대사를 체화시켜 무대에서 상대의 의도에 그 순간 반응하는 기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듣고 말하기'는 대사에 국한되는 느낌이 강하고, 'action-reaction'은 동작을 포함한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중요한 건 나의 의도와 상대의 반응이 물 흐르듯이 채워쳐 나가느냐가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둘 다 같은 개념이라 봐도 무방하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쪼가 형성되었다 쳐도 '듣고 말하기'가 충실했다면 매체가 달라진다고 적응 못할 리는 없다. 볼펜 물고 발음훈련하던 옛 배우들은 잠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매체가 다르다보니 발성법이나 동작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작동했을 것이고, 곧바로 적응했을 거다. '듣고 말하기'가 몸에 붙어 있던 그들은 어렵지 않게 영상매체에서 빛을 발했다.
얘기쌓기
'듣고 말하기'에 앞서 '얘기쌓기'라는 난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서너마디 주고 받는 거야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겠지만 드라마라는 게 길이가 솔찮다. 10줄 정도만 넘어가도 사건은 곧바로 발생하는 게 드라마다. 대사만 나열한다고 장면의 목표가 달성될 리 있겠나? 갈등과 의도와 들킴과 제압 등이 수시로 발발할텐데, 이는 분석했다고 쉽사리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얘기가 쌓인다는 말은 끊임없이 거짓 기작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 그 인물이 되어 상대 인물과의 게임에서 한치의 양보도 허용해서는 안되는 게 무대다. 당해주는 연기도 어마무시 어렵고, 제압하는 연기도 다르지 않다. 사랑을 나누는 일도, 복수의 서사도, 공포의 순간들도 모두 단계를 밟아야 하며, 인물의 일관성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게 '얘기쌓기'다.
단계와 일관성(unity)은 두고두고 되씹어야 하는 개념임을 잊지 않길 바란다. 당위성까지 포함하면 금상첨화다.
먼 길을 준비하는 젊은 배우들에게.....
터득되기 전까지는 '듣고 말하기'도 물론 어렵지만 '얘기쌓기' 단계 쯤 가면 거의 고문 수준이다.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거짓이 차곡차곡 쌓이면 무의식적으로 어떻게하든 제동을 걸게 되어 있고, 그걸 뚫는 과정이 무척 고통스럽다는 얘기다.
많은 배우지망생들이 오디션에 매여 있다. 특히 매체 쪽에! 관건은 '얘기쌓기'인데, 적당한 분량의 대사들로 이 난제가 풀릴 리 없다. '듣고 말하기'와 '얘기쌓기'의 터득은 일단 반복에 그 열쇠가 있다. 매체에서의 대사 분량은 너무나 미미하다. 최소 조연급은 되어야 하는데, 이 역시 시장에 비해 배우들은 차고 넘친다.
반복의 기회를 끊임없이 마련해야 한다. 오디션 준비가 반복일 리는 없다. 무대에서 관객을 두고 각성된 상태로 진행되는 '듣고 말하기'가 진정한 반복이다. 수만 수십만번은 반복되어야 뇌는 그제서야 대사가 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후 그 어떤 대사도 말로 구사할 수 있다. 연극 한 편 참여하면 일단 수백번 정도 '듣고 말하기'를 경험하게 되고, 상대 배우가 탁월하면 효과는 배가된다.
대사를 말로 구사할 수 있다고 정점에 다다른 건 물론 아니다. 그 때부터 기회잡기가 유리해진다는 얘기다. 일단 타고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울고, 웃고, 화내고, 짜증내고, 다그치고, 화해하고, 주춤대고, 허탈해 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이 모든 것이 '말'인 셈이다. 대사에 이 요소들을 기꺼이 실어낼 수 있다면, 묵직한 오디션일지라도 떨어질 리가 없다. 무의식을 지배하고 본능을 이겨낸 사람을 괴물 혹은 고수라 부른다. 오디션이 필요하려나?!
대학로(연극판)에서 젊음을 담보로 힘겹게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에게 이 글이 트리거가 되길 바라며 작성했다. 예상했던 거리보다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시기에 놓인 청년들에게.
"난 연기의 비밀을 풀기 위해 40년 넘게 고군분투했지만 아직 20년은 더 걸릴 거라 예상한다. 지금 65세니 85세나 되어야 그 뜻을 이룰려나?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즐겁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후에도 다를 바 없을 거다. 목표가 분명하다면 좌절도 짜릿함으로 여겨질테니 쓸데없는 망상(코티졸 중독)은 훌훌 던져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전진해 나가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