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류의 연출이 있다.
후진 연출, 좋은 연출, 남다른 연출!!
[벚꽃동산] 연습 중 Blocking을 긋는 날이다 치자.
1막에서 라네프스까야 일행이 막 벚꽃동산 저택으로 도착하는 장면이다.
후진 연출은
전날 밤 안간 힘을 다해 Blocking을 제도한다. 그리고 배우들을 모아 놓고, 이리로 저리로 이렇게 저렇게 이런 표정으로 저런 표정으로 손과 발은 이렇게.... 이쯤에서 이렇게 저쯤에서 저렇게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에서는 저렇게 이런 기분으로 저런 기분으로... 따위를 요구한다. 한 10년쯤 함께 한 배우라면 몰라도 참 난감하다, 배우들 입장에서는!
좋은 연출은
들뜨고/ 반갑고/ 춥고/ 어떤 짐을 어떻게 들고/ 어떤 발걸음으로/ 누구와 함께... 등등의 자기 포지션과 상태를 계산해 오라고 배우들에게 요구한다. 다음 날 몇 가지 순서와 방향을 정해서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가 바람직한 방향을 찾는다. 어느 정도 정리되면 Fix한다.
반면 남다른 연출은
들뜬 상태의 수위를/ 추운 정도를/ 짐의 무게를/ 대신할 소품 선택을/ 공연 때 입을 대체 의상을/ 함께 걷는 이와 어떤 얘기를 나눌 건 지... 따위를 세밀하게 연구하라고 과제를 준다.
다음 날 몇 가지 순서와 방향을 정해서 시도해 보고는 프로그램화 한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두어번 만나는 전체 연습 때마다 몸에 익히게 만들어 준다. 얼추 익으면 새로운 요구를 한다. 감정선이나 관계들이나 소도구의 사용법 걸음걸이 등이다. 이 역시 얼추 익으면 음악과 조화를 이루게 한다. 드레스리허설 즈음 최소 3일간은 의상과 소품을 갖추고 앙상블 연습에 치중한다. 3막 ’무도회 장면‘이나 4막 ’안녕 장면‘과 커튼콜도 같은 방식으로 프로그램화 시켜서 반복시켜준다. 참 친절하다. 나도 이런 연출을 만났더라면 배우 계속했을지 모른다,
내가 [벚꽃동산]을 연출하게 되면 이렇게 할 것 같다.
1. 들뜬 분위기를 몸에 익혀주기 위해서 다양한 즉흥극을 시도해 본다.
2. 어느 정도 들뜬 분위기가 몸에 붙으면 가장 합리적인 등장 순서나 위치나 방향이나 속도 등을 설정해 준다.
3. 가상의 대화와 소품들을 fix시켜 준다.
4.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충분히 형성되면 묵음 연습을 시킨다.
5. 음악과 함께 stop동작이나 slow motion 등을 훈련시킨다.
6. 전체연습이 있는 날은 몇 시간이고 이 연습을 반복시킨다. ’무도회‘,’안녕‘,’커튼콜‘도 함께!
연출은 배우를 탓하면 안 된다. 스텝을 탓해도 안 된다. 연출은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힘껏 Coach를 해줘야 한다. 짜증을 내면 진 거다. 화를 내야 한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기억시키기 위해 소리 질렀음을 반드시 납득시켜야 한다. 난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결코 그들을 탓하진 않는다.
훌륭한 연출이 되고 싶은가? 배우를 경험하라. 스텝을 경험하라.
실제로 무대에 서보라는 얘기다. 직접 디자인하거나 제작도 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다음 사항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1. 상대방 대사를 외웠을 때 시너지 효과를 반드시 확인시켜 줘야 한다. (상대 대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대사를 하거나, 상대 대사를 듣기보다 자기가 해야 할 대사에만 몰두하는 그 한 순간을 족집게처럼 찝어 내야 한다.)
2. 스텝 용어 사용에 뒤쳐짐이 없어야 한다. (조명기는 물론이고 덧마루 사이즈나 의상의 기본 용어 등은 숙지 해놓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그림을 한껏 요구할 수 있다.)
3. 대본 들고 Blocking에 임하는 배우는 혼쭐을 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과감하게 짜를 수 있어야 한다.)
4. 공연 즈음 제작물을 가져오거나, 바뀐 사항에 짜증내는 스텝은 다신 만나지 마라. (공연 직전에 의상 도착하게 만들지 마라. 무대 미니어추어 정도는 Blocking 전에 연습실에 당도하게 만들어야 한다. 스텝에게 연극은 끊임없이 시도하다 힘겹게 탄생되는 작업임을 조곤조곤 납득시켜 줘야 한다. 탓하면 안 된다. 반드시 납득시켜야 한다. 술값이 좀 들 거다.)
5. 연습 중반 즈음 대체소품 없이 연습에 임하는 배우도 역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고, 특수한 상황의 소품이나 의상 대체물 등을 제시 못하는 스텝도 단호하게 경고 줘야 한다. (제작비가 문제라면, 연출이 본보기를 보이고 배우들을 잘 꼬시면 다들 스스로 해 온다. 역시 술값이 좀 든다.)
배우나 스텝 입장에서 볼 때 이후 다시 만나고 싶은 연출이 되려면 그들의 입장을 확실하게 겪어라. 뜨고 나서 그러라는 게 아니다. 뜨기 전에 충분히 경험하고 연출이 되라는 얘기다.
또다시 강렬하고 직설적인 글을 써대고 있다.
이런 내가 스스로 오만하다 느껴지는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라도 퍼붓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피터 브룩‘을 넘고, ’로버트 윌슨‘과 ’로베르 르빠주‘의 감동을 실현시킬 것인가?
여건이 열악하다면 여건을 만들어 내야지! 4차 산업이 도래할 사회가 멀지 않았다. 80세까지만 잘 버티면, 매너리즘에만 빠지지 않으면, 공부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건강만 잘 지켜낸다면....
승산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