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접근
최소 2년간 펼쳐질 스터디 과제는 유럽의 역사다.
서양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수준까지 미칠 확률은 거의 없지만서도 그들이 살펴보기 힘든 부문을 파고들어 오타쿠의 경지에 이를 수는 있다.
영국사로 한정하면 조금은 미시적이다. 그래도 너무 크다. 엘리자베스여왕 시기로 좁혀보자. 당시의 정치, 종교, 예술 분야로 좁히면 상당히 미시적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의 지인들로 좁히면 완전 미시접근의 모습을 갖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량은 넘친다.
거시접근
서양사는 그 자체로 거시학문이다. 평생을 공부해도 터득하기 힘들다. 역사 속에 철학이 있고, 과학이 있고, 문화 등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부 좀 했다 싶으면 새로운 관점의 이론들이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전공의 입장에서도 평생을 긴장하고 살펴 봐야 하는 학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 다다르는 과정도 결코 만만찮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상식적인 수준인가? 이에 대한 질문만으로도 머리가 깨진다. 역사공부가 배우의 삶에 필요하기는 한가? 이 질문이 더 난처하다. "배역 맡으면 그때 공부해도 되지 않을까요?" .....흠
설마 배역 공부를 위해서 그 힘든 역사 스터디를 전개해나갈 리는 없다. 인간을 공부하자는 거다. 세상을 공부하자는 거다. 얽히고설킨 비밀들을 풀어보자는 거다. 인식, 관점, 원리, 기호, 은유, 풍자, 독살, 배신, 정의 등을 공부하자는 거다. 거시접근의 목적이고 미시접근의 목적과도 다를 바 없다.
데자뷰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연예인들의 화려한 소식들은 배우의 꿈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반면 그들의 자살과 파산과 범죄행위 등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셰익스피어 시대를 공부하다보면 데자뷰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도 성공과 파멸과 시기질투와 정치성향이 난무했고, 관객(군중)의 변덕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사망 전까지 누리던 천재나 교묘(현명)한 연극쟁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책을 읽다보면 성공의 케이스가 더 많아 보이는데 사실은 완전 반대다. 실패한 자들은 기록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 사실 그 숫자는 어마무시하다.
탈튼, 켐페, 아르민
난 지금 미시접근 공부 중이다.
Richard Tarlton( ~1588)
William Kempe(1560~1603)
Robert Armin(1568~1615)
이들의 공통점은 셰익스피어시대 때 활동하던 광대들이다. 일반 배우들이 아닌 광대(fool) 전문배우라는 얘기다.
소극(farce)배우고, 잔니(Zanni)고, 연주자고, 댄서고, 곡예사고, 시인이었다. 심지어 '여왕의 광대'이기도 했다.
이들을 이해하고, 내리 파고, 외우다 보면, 벤 존슨도 보이고 리처드 버비지도 인지된다. 당대 극단들은 물론이고 테임즈강변의 극장들도 하나둘씩 그려진다. 익숙하지 않은 걸 이해하고 외우는 과정이 오타쿠의 출발점이다. 초기엔 입에 붙히기 위해 잘난 체 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토론할 때 최고의 무기는 '년도 외우기'고, '관계짓기'다. PPT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대표적인 시도들이다.
올겨울 무조건 paper(소논문)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고, 칠판에 발표제목 적고 자료없이 완전 기억만으로 10분간 나를 포함한 강화멤버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공부하기는 싫고 배우는 되고 싶어서 강화도로 입성했다면 그건 완전 착각이다. 무식한 배우는 한계가 있다. 영양가 있는 예를 들어줘야 한 단계 한 단계 업시킬 수 있는데, 맨날 이병헌이나 최민식 가지고는 정말 힘들다.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예를 들 때 그들의 고민과 탐구를 제시한 건데 순간 겉모습만 기억한다. 뇌의 속성인건 알고 있지만 ... 요즘 내가 한계를 느낀다.
쉽게 예시하고 쉽게 터득한 연기술은 쉽게 사라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어찌 타개할 것인가?
유명해지긴 했는데 불행한 배우들을 어찌 설명할 거며, 작품분석은 연출이 해줄 거라는 망상은 또 어찌 깰 거며, 과연 Unity(일관성/통일성)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는 있을라나?
공부시켜야 하는 이유다. 모두 나 편하자고 시키는 거 맞다. 극단에서 대학원 수업 받는 거 같은 건데... 사실 남는 장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