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를 가지고"보다는 "정서가 생기게"가 정확한 표현이다.
정리하면 파충류의 뇌는 현재, 둘레계통은 과거, 새겉질은 미래를 맡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KAIST 정용교수
다시 정리하면
"R복합체는 현재, 변연계는 과거, 신피질은 미래"다.
'R복합체'는 본능을 관장한다. '변연계'는 고통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관장하고, '신피질'은 이해하고 계획하는 일을 관장한다.
대본을 볼 때는 신피질이 작용한다. 그러나 연습이 본격적으로 들어갈 즈음엔 끊임없이 변연계를 작동시켜야 되겠지. 물론 공연 땐 R복합체의 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고 그래야 관객들이 뻑이 갈거고.
연습하다보면 어떤 대사에서 어떤 감정이 생기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도 좀체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대개 정서를 '가지고 했기' 때문이다.
정서가 '생기게' 만들려면 변연계를 끊임없이 자극해야 한다.
뇌하수체를 작동시켜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혹은 코티솔 등의 분비를 유도하거나 편도체를 자극해서 정서를 불러 일으켜 내야 한단 얘기다.
그리고 해마에 단기기억들로 저장한 다음에도 유사한 느낌들을 반복 시도해서 어느 순간 장기 기억으로 변환 될 때까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장기기억에 입력되기만 하면 공연 즈음 거의 본능적으로 '현재 이 순간'이 되지 않을까?
ㅋㅋ 이쯤 읽으면 머리가 지끈거릴거다. 이제 일반적인 문장을 사용해 보겠다.
"정서가 생기게"란
보통 연습할 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고 기억을 만든다. 그리곤 발표할 때 '그렇게 했는데' 교수님이나 다른 학생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서를 가지고라는 말에 속았던 거다. 계산한 게 다 읽혔던 거지. 계산한 게 읽히는 한 결코 리얼할 수 없다.
리얼이란 건 우리네 삶에서 비롯된다. 복도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이렇게 말을 걸어야지 저렇게 장난쳐야지 하진 않는다. 설사 한다해도 행동은 거의 즉흥적이다. 음의 높낮이나 행동들의 세세함을 계산하진 않는다.
정서를 가지고 생활하진 않는다. 정서를 가지고 싸움하진 않는다. 정서를 가지고 이별하진 않는다.
정서는 그 순간 발생하는 거다. 발생 전 단계까지는 결코 다음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 순간이 와야 진짜 감정이 생긴다.
그래서 plot이 중요하고 bit분석이 필요한 거다.
그 순간 그러한 감정이 발생하게끔 치밀하게 과정을 밟기 위해선 plot과 bit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 집중 시간이 열라 필요하고,
- 해결해야된다는 절대절명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 상대 배우와 살다시피 해야 하고,
- 스마트폰으로 인한 집중 분산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정서가 생기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든 연극용어를 사용하든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 역시 해도해도 안되든 시절이 있었고, 이후 수많은 후배나 제자들에게 티칭하면서 느낀 아쉬움이 절절했던지라.... 어케든 번듯한 연기프로그램 하나 완성시켜 볼라고 뇌과학까지 펼쳐보게 된 거다.
혹시 뇌과학엔 쉬운 답이 있을까? 진화학이나 세포학엔 더 수월케 설명할 원리들이 있을까? 혹은 경제학 용어라면? 물리학이나 화학이 나을려나?
내게는 확연한 원리들이라 할지라도 녀석들에게는 참 구름같은 내용들인가 보다. 설명 무지 잘해주고 지네들도 다 끄떡댄 수업이었는데두 담 주엔 딴 짓을 한다. 이 반복이 참 안타깝다. - . -
내 수업을 한번이라도 들은 녀석들이라면 이 글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씹어 읽어내리라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읽다가 "맞아!" "그래!" 머 이런 느낌이 위험한 거다.
이해하라고 쓴 게 아니라 적용하라고 쓴 거거등 *~*
'정서를 가지고'의 폐해
연기 코멘트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 '정서를 가지고'는 수많은 연기 초짜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정서는 영어로 'emotion'을 일컫는 말일텐데 '감정을 가지고'라는 말로 한순간 전환된다.
코멘트 하시는 분들이야 내포된 의미를 주장할지 모르나 받아들이는 이들은 여지없이 감정잡기에 몰두한다. 그리고 한치 벗어남 없이 '똥'을 싼다.
흔히 '똥을 싼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연기자들이 잔뜩 힘을 주고 대사한다는 뜻이다. 즉 Tention 상태로 변화없이 억눌린 감정만으로 그 긴 대사를 지리하게 소화해내는 현상을 말한다.
- '정서가 생기게'가 정확한 지시 문장이다. -
감정은 대사가 진행되는 중에 발생하기 마련이다. 미리 갖는 게 아니고 입을 떼는 순간 들러 붙게 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정서는 대사를 하기 직전 자신의 입장 혹은 갈등 요소 등을 미리 준비하라는 얘긴데....
입장이나 견해 혹은 갈등요소 등은 대뇌피질의 작용이고 감정은 변연계(뇌하수체 편도체 시상하부 등)의 작용이다.
감정은 호르몬의 결과물이다. 호르몬은 분비되는 중에도 끊임없이 제재를 받고 한 순간 믹스가 되고 또 한 순간 폭발한다. 그 순간에도 제재는 이루어진다.
감히 대뇌피질의 속도로는 감당이 안되는 스피드로 진행된다. 흥분의 속도를 대뇌가 감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다. 3할대 타자처럼 0.1초 판단을 훈련으로 습득해내기 전에는!
"대사를 말로 인식하고 그 말은 반드시 상대에게 해야만 변연계가 작동한다."
'진실'의 오해
흔히 '진실'이라 표현되는 연기용어는 과학적으로 풀자면 '정확한 거짓'이다.
대사를 Nature 상태로 유지하는 동안은 무지 부끄럽다. 인간은 거짓말할 때 부끄럽게 여기도록 진화되었다. 대사는 내 말일 수 없으니 당연히 거짓이다. 진실로 하라는 이야기는 진짜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하라는 얘기인 것이다.
소극(farce)나 꼬메디아 델 아르떼 연기 양식들이 오늘 날 사실주의 연기에 훨 가깝다.
그리스 로마 연기나 낭만주의 연극에 비하면 당연히 더 가깝다는 얘기다.
farce 배우들은 시장통에서 관객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 살아있는 감정 즉 진짜 아프고 진짜 억울하게 여기도록 연기했기에 그나마 푼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기가 막히게 관객들을 속여댄 것이다.
진지하게 연기해야 하는 낭만주의나 고전극들을 보고 진실이라는 단어를 붙힌 게 아닌가 싶다.
진실로 느끼게 하는 확실한 거짓인 건데.....
진실되게 true 진짜같이 real 자연스럽게 natural
모두 같은 말이고 시대에 따라 유행하고 선택되던 운명의 단어들이다.
이 시대에서는 real이 좀 효과적일 것 같다.
"야! 진짜처럼 안 느껴지잖아? 스스로를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