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관객의 연극 : 몰리에르 작, 김태용 연출 <스카펭의 간계>
오세곤(순천향대 교수, 극단 노을 예술감독)
연출: 김태용
번역: 박영옥
작가: 몰리에르
공연기간: 2010.12.21-12.26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2010.12.25. 19:00
흔히들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와 같은 대가들에 대해 ‘관객을 아는 작가’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을 아는 작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연극의 필수 구성 요소로 무대, 배우와 함께, 관객이 포함되는 한, ‘연극을 안다는 것’과 ‘관객을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뜻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에 있어 관객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관객(觀客)을 그대로 풀이하면 ‘보는 손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극 관객에 대해서는 그보다 훨씬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즉 말과 동작을 주요 전달 수단으로 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관객에게 우선 필요한 감각은 시각과 청각이다. 그러나 그저 시각과 청각으로 ‘보고 듣는’ 차원이 아니라 ‘보고 듣고 이해하는’ 상태를 필수 요건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한다. 그 이해의 책임은 관객보다는 공연자에게 있다. 적어도 관객들이 이해 못 한다고 관객의 수준을 탓하기에 앞서 전달이 안 되면 작품 자체가 형성 안 된다는 사실에 과연 얼마나 고민했는지 반성하는 것이 옳다. 또한 관객은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신만 이해 못 한다는 착각에 빠져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자기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위 ‘어려운 연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예술이니까, 또 고급예술이니까 당연한 것일까? 천만에, 절대 아니다. 연극은 쉽고 재미있는 것이다. 운동경기를 보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한다. 규칙을 알아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나, 체조나, 규칙을 모르고 보면 재미가 없다. 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과 문화를 웬만큼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연극이다.
사실 어렵다는 말과 연극은 서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어려운 게 심하면 난해한 거고 그렇다면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해가 없으면 진정한 관객이 될 수 없다. 결국 어려운 연극은 올바른 관객 형성을 가로막으니 어려운 연극이란 스스로 자신의 구성 요건을 파괴하는 셈이 된다.
연극은 유명한 작품일수록 어려운 경우가 거의 없다. 특별히 규칙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연극이 어려워서 전달이 잘 안 된다면 오랜 세월 많은 지역에서 각광받는 명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는 작가와 연출과 배우를 겸했던 현장 연극인들이다. 그런 이들이 관객들에게 호소하지 못 하는 연극을 만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작품이 어렵고 재미없다면 그건 거의 틀림없이 번역이나 연출, 또는 연기의 문제일 것이다.
‘어려운 연극’과 마찬가지로 ‘재미없는 연극’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한다. 연극은 현장예술이고 따라서 객석의 조그만 움직임도 무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으레 공연 시작 전 이동을 삼가달라는 명령조의 멘트가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재미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연극은 재미없어도 참고 보는 것을 마치 미덕인양 강조한다. 그러나 이 또한 대단히 잘못된 태도임이 분명하다.
연극의 주된 기능은 무엇일까? 즉 왜 연극을 보는 것일까? 오락적 기능과 정화작용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연극은 허구이다. 사람들은 허구를 즐기기 위해 극장에 간다. 그렇다면 왜 허구를 즐기는 것일까? 그건 일상의 탈피로 이해하면 된다. 주말에 등산을 가는 것도 일상의 탈피이고 종교 생활도 일상의 탈피이고 오락을 즐기는 것도 일상의 탈피이다.
그렇게 일상을 탈피했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정신 건강에 훨씬 유리하다. 바로 정화작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화는 새로운 출발을 도와준다. 주말 내내 집에서 잠만 잔 사람보다 어떤 형태로든 일상을 탈피했던 사람이 더 힘차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탈피와 정화작용이 이루어지려면 그 내용이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어려운 연극’은 일단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쉽다고 무조건 성공할 수는 없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쉬우면서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것, 그게 바로 재미이다. 재미는 관심이다. 관심이란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수반한다. 그 점에서 재미는 말초적 흥미와는 전혀 다르다. 말초적 흥미는 그 순간일 뿐 지난 뒤에 남는 생각이나 감동은 없기 때문이다.
통상 웃음만을 재미와 결부시키지만 연극의 재미란 그렇지 않다. 공연을 보며 웃든 울든 화를 내든 거기 끌려들어 관심이 일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건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 재미에 감동까지 더해지면 대개들 좋은 연극이라 한다. 사실 연극이란 게 세상을 확 뒤집어 놓는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잠시 재미와 감동에 빠져 세상에 대해 조금은 여유 있게 되는 걸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게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국보라면 몰리에르는 프랑스의 자랑이다. 물론 둘 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넘어 전 인류에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몰리에르가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중요해진 데에는 1992년 창단 이후 줄곧 코미디에 집중해 온 극단 수레무대의 공이 크다.
스카펭은 서양 코미디에 자주 등장하는 머리 좋은 하인의 전형이다. 이탈리아 꼬메디아 델 라르떼의 아를레키노로부터, 셰익스피어 작 <리어왕>의 광대, 보마르셰 작 <셰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까지 모두 같은 맥락의 인물들이다.
더욱이 내용 또한 여기저기서 짜깁기를 한 듯하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는 늙은 부모가 있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사랑을 성사시켜주는 머리 좋은 하인이 등장하고, 서로 엉켜 복잡한 듯하지만 우연의 반복으로 이내 술술 풀리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은 서양 희극에 거의 공통적인 내용이다.
이렇게 인물이고 내용이고 독자성이 없으니 자칫 진부하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간다면 프랑스인들이 심히 섭섭해 할 정도의 작가이며 <스카펭의 간계>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여기서 하나 짚자면 연극에서 인물이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유사한 내용과 인물이라도 어떤 작가가 쓰면 명작이 되고 어떤 작가가 쓰면 한없이 지루한 졸작이 되는 그 신기한 과정이야말로 연극의 본질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라 하겠다.
그러나 <스카펭의 간계>라는 희곡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아무리 좋은 희곡이라도 무대형상화 과정이 부실하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공연에 있어 극단 수레무대의 연출과 배우들은 작가 못지않게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무대는 모든 사실적 장치를 배제하고 오직 끈이 달린 커다란 시소오만을 배치했다. 마치 우물물을 퍼 올리듯 배우를 등장시키는 이 기구는 무대 중앙에서 관객들의 상상에 따라 모든 배경을 대신한다. 참으로 과감한 생략이며 실로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연출 김태용은 이제 코미디에 관한 한 확실한 주관을 확립한 듯하다. 이번 공연을 보건대 우리 연극계 고질인 소위 번역투의 문장마저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그녀’ 등 분명 우리말에 없는 부자연스러운 인칭대명사를 그대로 두었건만 관객들은 불편해 하지 않는다. 희곡번역 전문가를 자처하며 이에 대해 늘 문제 제기를 해온 필자로서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객이 수용하는 상황에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이에 있어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수레무대 배우들의 대사는 고도로 숙련된 움직임과 더불어 이미 춤과 노래와 같은 경지에 도달했고, 그래서 일상어 차원의 문법적 차이로 느끼는 불편함과는 무관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수레무대는 엄청난 훈련을 소화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생활하는 극단이다. 경우에 따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그대로 공동생활을 한다. 국내 어떤 극단보다도 고도의 숙련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 숙련도야말로 수레무대 연극이 관객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핵심적인 재산일 것이다. 앞서 번역투의 문장조차 연극적으로 승화시키는 것과 같은 능력은 현재 우리나라 그 어떤 극단도 흉내낼 수 없는 것임이 확실하다.
결국 <스카펭의 간계>는 희곡을 쓴 이나 그것을 무대화한 이들이나 모두 관객을 알고 연극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공연에서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공을 넘어 우리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몰리에르에게 감사하고, 또 그의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우리 연극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이처럼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 즉 ‘진정한 관객의 연극’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크게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