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연극생활 10년이 넘어서면서 연극인들을 꽤 많이 만난 셈이 되었다.
평론가들도 적지 않게 만나고 스텝분야도 배우도 이럭 저럭 몇 백명은 만난 것 같다.
간혹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수레무대의 작업은 정성이 많아 좋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우리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까? 혹은 왜 창작극을 안하냐는 질문도 적지 않다.주로 평론가들의 질문이긴 하지만 연극 매니아들도 기자들로 간간이 묻는 내용이다.
이야기에 대한 문제는 한 순간도 멈춤없이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고 있다. 이 현실에 어떠한 이야기가 정녕 이 시대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고난한 삶을 어떠한 이야기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저런 관점으로 자꾸 자꾸 되풀이 질문을 해 본다. 이미 20년은 넘은 사안인 것 같다.
23년 동안 연극 공부를 해왔다. 지금도 난 공부하는 과정이다.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흐릿하고, 몰리에르는 간헐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체홉이 보일려면 또 몇 수년이 지나야 알아질려나.
연극의 양식에 대한 도전으로 보낸 시간이 대략 15년 정도 흐른 것 같다. 이야기는 언제든 해 볼 수 있지만 양식은 반드시 시행 착오를 거쳐서야 깨닫게 된다. 체홉이 왜 코미디며, 피터 브룩이 셰익스피어를 저리 풀어낼 수 있었는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조금씩 걷혀가는 듯 하지만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
이렇듯 연극은 연기 뿐 아니라 무대적 요소, 리듬과 템포, 전개 방식 등등해서 습득해야 할 요소가 너무나 많다. 감히 이야기를 꿈꾸지 못하는 셈이다.
현 지원제도가 1년 단위이기에 항상 리듬이 끊겨가며 준비를 하는 셈이다. 그나마 연기자들이 제자리를 지킨다면 조금이나마 단축되려나? 그도 현장인들이라면 다 아는 얘기겠지만 어림도 없다.
대학로에서의 적지 않은 감동들을 기억한다. 헌데 레퍼토리화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대로 평가 좋은 연극은 투자가 다를 때 이뤄진다. 배우들도 뛰어나고 제작비도 솔찮다. 한해 반짝하고 사라지고 나면 모두가 추억이 되고 만다. 23년 전 유덕형 연출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가 나에겐 텍스트였다. 25년 전 안민수 연출의 <태> 하멸태자>의 미국 유럽 공연은 나에게 조차 전설이다. 얘기로만 전해 듣고도 감동을 받은 셈이다. 불과 2년 차이로 난 그 작업의 감상들을 놓친 것이다.
그 감동들은 주로 양식에 대한 부분이다. 밀도에 대한 부분이고 연기에 관한 요소들이다. 연출의 해석도 적지 않았겠지만 이야기보다는 양식이다. 즉 기술인 셈이다.
리투아니아의 <행릿>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힘이 대단했다. 문제는 기술이 갖추어졌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태리 극단 피콜로의 <두 주인을 섬기는 하인, 아를레키노> 역시 연기의 힘이 받쳐주기에 가능한 감동이었다.
난 작업인이기에 이러한 감동의 연극을 제작하고 싶은 것이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언젠가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다 시기가 오면 내 생의 모든 것을 걸고서 투자하리라 믿는다. 이야기에 대한 준비는 살아가며 읽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 큰 문제가 없다. 여전히 열쇠는 양식에 대한 확신과 그 양식에 대한 준비된 연기자들의 확보에 있다.
평론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는 영화든 소설이든 또 다른 매체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연극은 연극적이어야 하고, 연극이 뛰어난 또 다른 매체를 능가하려면 그 준비가 1,2년에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평론가들이 연극을 볼 때 이 점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인가? 무슨 이야기를 위한 준비인가? 연습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등등
96년 암스텔담 고호 박물관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고호의 초기 작품들 조차 그 엄청난 값을 해내는 것은 어디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003년 새해를 맞이하며 지친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안으로....
극단 수레무대 김태용 올림
2003/01/03 03시20분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