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메디아는 현실이다. 내면이고 진실이고 할 것 없이 그 순간 재미없으면 끝장이다. 리듬이 끊기면 여지없다. 관객들은 자리를 떠난다.
14세기경부터 이태리에서는 꼬메디아 델 아르데라고 불리우는 전문직업연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재주있는 자들이 연극을 표방하며 여럿 모여 전국을 떠돌며 무대를 연다. 간혹 지역극장에서 간혹 시장바닥에서 광장에서 판을 벌린다. 자연히 수레무대가 필요했다. 이동 수단인 수레가 어느 순간 무대가 되고 광장에 모인 관객들은 배꼽을 잡으며 박수를 친다.
물론 선배 배우들이 후배 연기자에게 몇가지 기술들을 가르쳐주었겠지만, 진짜 연기는 실전에서 터득된다. 몰리에르 역시 그 과정을 겪는다. 비극 배우로 출발했던 몰리에르 역시 연기 중에 관객들이 자리를 뜨는 수모를 몇번이고 겪었다.
수레무대라는 극단명은 몰리에르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다. 몰리에르에게 결정적 열쇠를 쥐어준 꼬메디아 델 아르떼에 대한 경외심이다.
꼬메디아는 일종의 창고이다. 보물 창고!
그 속에는 진짜 리듬 진짜 템포 진짜 게임이 존재한다.
볼 수 있는 자들만의 창고라는 점에서 난 행복하다.
리얼리즘이 '안에서 밖으로'라면
꼬메디아는 '밖에서 안으로'이다.
화를 내고 생각한다. 화를 내면 엔돌핀이 쏟는다. 그 화학물질은 또 다른 자극을 만들어 진짜일 수밖에 없는 소리와 움직임을 양산해 낸다. 물론 훈련을 거쳐야 한다. 꼬메디아의 훈련을 상상해 본다. 우선은 언어나 상황이 있어야겠지. 수레무대에서는 주로 일정한 대사를 외우게하고 그 대사를 말하고 말하고 말하게 한다. 남아돌게 만든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충돌시킨다. 파편은 체내 속의 화학물질을 생성케하고 생성된 화학물질은 소리와 움직임을 상황만큼 리듬만큼 그 만큼으로 표현되게 만든다.
무대에서의 진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순간의 진실된 표현이다.
이야기는 연출의 몫이다. 연기자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이후 연기자는 이야기를 관통할 때까지 연습을 한다.
연출은 순간의 거짓을 잡아내고 지적한다.
연극 한편에 석달 넉달 연습은 기본이고
합숙을 해야함은 물론이다.
그러고도 10년은 족히 걸릴 작업을 한다.
그게 꿈이다. 꿈은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까짓 현실은 발버둥친다고 호전되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 천재가 되는 길 밖에 없다. 도사가 되면 설마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할래나?
꿈은 의외로 쉽게 실현된다. 시간의 개념만 달라진다면.
20대 중반에 취직을 해야하고 30대 초반에 결혼을 해야 하고 30대 말에 전임자리를 꿰차야 하는 현실적 시간 개념을 여지없이 깨부셔야만 한다.
무슨 차이인가 30대 중반에 먹고 사는 일 정도야 우습게 보고 4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40대 말에 전임을 한다해서 그 얼마나 손해를 보았단 말인가?
30대에 질문을 하면 40대에 확인을 해야 한다. 대략 10년 차인데.
대신 50대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현실 시간을 선호한다.
꿈이 없는게지.
연극이 현실이면 이미 그건 예술로서의 연극은 아니다.
예술은 시간 개념이 다르다.
빈센트 반 고호가 그랬고 고갱과 세잔느가 그랬다.
칸딘스키가 서른되어 미술을 시작했듯이
우리는 서른이 되어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
대신 스물처럼.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빠르다는 건 매너리즘을 향해 달려가는 지름길이다.
늦을수록 좋다. 물론 준비와 질문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연습실에서 수레무대....
2002/02/24 15시50분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