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프랑스 고전주의
몰리에르
프랑스의 비극이 라신느로 완숙의 경지에 달했다면, 프랑스의 희극은 몰리에르로 그 정상에 올랐다. 본명이 장-밥티스트 뽀끌랭(Jean-Baptiste Poquelin)이었던 몰리에르(Moliere, 1622-1673)는 파리의 부유한 가구상의 아들로서 1643년 연극에 입문하기 전까지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사업이었던 떼아트르 일뤼스트르(Theatre Illustre)가 실패하자 몰리에르와 그의 일행은 1646년부터 1658년까지 프랑스의 지방을 순회하였다. 이 동안에 이 집단은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들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금새 오텔 드 부르곤뉴 다음가는 제2의 극단이 되었고 희극에서는 오히려 앞섰다. 몰리에르는 루이 14세(Louis XIV)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리슐리외가 지은 빨레-르와얄 극장의 사용허가를 얻는 한편 많은 논쟁에서 그의 보호를 받았다.
오늘날 몰리에르는 주로 성격희극 및 사상희극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다른 종류의 희곡도 아울러 썼다. 코메디아 델 아테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많은 그의 희곡들이 코메디아의 등장인물 유형을 내세운 소극(笑劇)들이다. 그는 또한 궁정을 위해 여러 편의 코메디 발레(comedy ballet: 춤이 있는 희극적 희곡)를 썼고 비극에도 손을 대보았다. 그는 그의 경력 전체에 걸쳐서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플라우터스, 테렌스, 코메디아, 그리고 스페인과 이태리의 원천들로부터 차용했다. 몰리에르의 작품은 동시대 비극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보편적인 호소력을 견지해 왔다. 코르네이유와 라신느의 작품이 프랑스 밖에서는 거의 상연되고 있지 않은 데 반해서 그의 희곡들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직도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유명한 작품들로는 『부인학교』(The School for Wives, 1662),『따르뛰프』(Tartuffe, 1664),『수전노』(The Miser, 1668),『마음이 내키지 않는 의사』(The Doctor in Spite of Himself, 1666),『염세가』(The Misanthrope, 1666), 『예비신사』(The Would-Be Gentleman) 및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The Imaginary Invalid, 1673) 등이 있다. 그의 희곡의 한 예로 여기서는 『따르뛰프』를 상론해 보겠다.
『따르뛰프』
『위선자 따르뛰프』는 1664년에는 3막극으로, 1667년에는 다른 형태로, 그리고 1669년에는 현재의 5막극으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완성된 후 거의 끊임없이 공연목록에 속해 왔고 몰리에르의 다른 어떤 희곡보다도 자주 공연되어 왔다.
주제와 사상. 『따르뛰프』는 분명히 종교적 위선을 다루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겠지만 작품을 규명해 주는 역사적 사건을 돌아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몰리에르가 풍자하고자 했던 가장 확실한 표적은 아마 성례단(聖禮團)이라 하여 1627년에 설립된 비밀결사로서 1660년까지 프랑스 전역에 영향을 미쳤던 단체였을 것이다. 이 단체의 목적에는 이교(異敎)의 탄압, 자선 및 선교사업의 촉진, 그리고 도덕률의 개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마지막 목표를 추구하면서 이 단체는 '성령의 경찰'을 두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정탐하게 하였다. 어느 평론가가 이 집단에 대해 말한 바처럼, "소박한 민중들 같으면 추악한 행동이라 부를 것들을 자신들의 의도의 순수성을 내세워 신성화하면서 아무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광신도들이 이 단체의 첩자들이었다."
몰리에르는 1644년 『따르뛰프』가 초연되기 전에 여러 사람들에게 작품을 읽어 주었는데 이 성례단이 곧바로 그에 대해 집요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논쟁이 매우 격해지자 급기야 루이 14세가 더 이상의 공연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몰리에르는 1667년에 반대를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작품을 수정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수정본이 제시되었던 1669년까지는 반대가 대부분 사라졌었다.
몰리에르가 이 단체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느냐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주는 이 성례단과 같은 단체들을 그가 생각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몰리에르는 작품의 결말을 통해서 이런 위선자들이 없어질 때 프랑스가 더욱 번영하리라는 것과, 왕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진실과 허위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모든 몰리에르의 작품에서처럼, 인생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가 『따르뛰프』에서도 견지된다. 몰리에르에게 있어서 경건은 쾌락의 포기를 강요하지 않고 그것의 올바른 활용을 요구한다. 진정으로 신앙깊은 자는 경건한 언사보다는 스스로 좋은 본을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세상을 개혁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작품의 어느 대사에서처럼 "그들은 천당 자체보다도 더 뜨거운 열심으로 천당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
몰리에르가 즐겨 다루었던 또 하나의 토픽은 강제결혼이다. 부분적으로 이 주제는 과거의 연극, 특히 로마 희극과 코메디아 델 아테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인데, 거기서는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따짐이 없이 강제로 자식들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아버지들의 기도를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기 일쑤였다. 몰리에르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대부부의 결혼악들은 강요된 결합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한다.『따르뛰프』에서도 그는 그러한 결혼이 간통을 나기 쉽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결혼은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다. 본 주제는 위선이다.
플롯, 구조 및 성격창조.『따르뛰프』의 플롯은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오르공(Orgon)을 완전히 장악한 따르뛰프를 보여 준다. 따르뛰프의 가면을 벗긴다. 따르뛰프가 복수를 시도하다. 따르뛰프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끝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중요한 변전이 세 차례 있다. 첫번째(따르뛰프의 정체 탄로)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진정한 상황을 알도록 해분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기는 행복은 금새 사라진다. 오르공이 따르뛰프의 덫에 완전히 걸린 것이다. 오르공의 얇은 귀가 그를 이런 처지에 빠뜨렸으므로 그는 벌받아 마땅하겠으나 죄 없는 식구들이 함께 연루되어 있다.
처음의 두 변전(따르뛰프에 대한 역습, 오르공에 대한 따르뛰프의 역습)은 사려깊게 예시되었으나 마지막 것과 작품의 해결은 그렇지 않다. 억지스러운 종결(따르뛰프가 느닷없이 악명높은 범죄자임이 밝혀진다)이 비난의 주요 대상이 되어 왔다. 정의가 승리하고 정상(正常)이 회복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감정상으로는 만족스러운 종결이지만, 훌륭한 극구성이라는 기존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이 억지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체된 따르뛰프의 등장 때문에도 몰리에르가 비난을 받았다. 그는 3막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러나 이 지연이 우연은 아니었다. 몰리에르는 직접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처음의 두 막을 온통 나의 악당의 등장을 위해 준비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방청인을 농락하지 않는다. 관객은 처음부터 그에게 부여한 특징들을 안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악당의 성격을 관객에게 그려 주지 않을 것이며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몰리에르가 따르뛰프의 성격에 대한 일체의 혼동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1막에 상식적인 등장인물인 끌레앙뜨(Cleante, 몰리에르의 관점을 가장 가까이 대변하는 인물)의 긴 사설을 삽입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이 사설에 참다운 신앙과 거짓이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몰리에르 희곡에는 이와 비슷한 토론이 들어 있지만, 대체로 그것은 종반부에 나온다. 이 주장을 『따르뛰프』에서는 막에 삽입했다는 것이 관객에게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하는 몰리에르의 의도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따르뛰프』의 구조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용도 검토를 통해서도 확연해진다. 모든 막(무대상의 행동 면에서)에서 중요한 인물은 오로지 오르공 한 역뿐이다. 끌레앙뜨는 그의 주된 기능-상식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1막에서 나타난다. 그는 4막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4막과 5막에서 그는 그가 1막에서 발설했던 사상들을 단순히 재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작품 속에서 그의 존재는 행동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다만 주제를 강조할 따름이다.
몸종 오린느(orine)는 각 막에 두루 등장하지만 그녀의 역은 사실상 3막이 시작된 직후에 종료된다. 물론 그 시점까지는 그녀가 주요 등장인물이기는 하다. 그녀의 솔직함과 개방성은 오르공의 경솔함, 연인들의 변덕, 따르뛰프의 거짓 신앙 등을 보여 주기 위한 거울로서 쓰인다. 그녀의 지혜와 상식으로 그녀는 저 과장된 행동을 적당한 원근 속에 집어넣어 준다. 따르뛰프가 등장한 뒤에는 그녀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
따르뛰프마저도 준비를 위한 두 막 뒤에 마침내 등장할 때 기이한 처리를 당한다. 그는 지금까지 쓰여진 것 중 가장 유명한 등장대사 중의 하나를 갖고 있다. "로랑, 내 고행복과 채찍을 치우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너를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해라. 누가 나를 보자고 하면 사람들이 내게 준 연보(捐補)돈을 죄수들에게 나누어주러 갔다고 말해." 그러나 그의 역의 주요 부분은 엘미르(Elmire)와의 두 '사랑장면'이다. 몰리에르는 아마 일찍이 다른 등장인물들에 의해 그려진 따르뛰프의 그림을 관객이 당연히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 것 같고 따라서 작품은 그의 위선의 한 측면마을 보여 주면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도린느에 대한 따르뛰프의 처음 대사(자기 내부에서 악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녀의 가슴을 손수건으로 가리라고 하는 대사)는 그의 음탕한 성격을 노출시켜 주며 무대 위에서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 성질이다.
따르뛰프는 다미스(Damis)가 그를 탄핵할 때 그의 성격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인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 비난을 겸손하게, 믿음 깊은 사람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 장면이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오르공이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속게 되었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5막은 지금까지 위선으로 가려져 왔던 따르뛰프의 참 성격을 보여 주지만 또 한편 관객이 따르뛰프에 대해 아는 바는 대부분 그가 무대 위에서 실제로 해 보이는 행동보다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바를 통해서 얻은 것임도 사실이다.
연인들인 발레르(Valere)와 마리안느(Mariane)는 2막에 등장하며, 그 후부터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오르공이 얼마나 따르뛰프에게 영향받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기여할 뿐이다. 왜냐하면 오르공이 그의 딸 마리안느를 따르뛰프에게 결혼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언쟁은 재미를 제공하고 있으나 나머지 극과는 무관하다. 코메디아에서처럼 연인들은 선남선녀이고 올바르며 서로의 사랑을 받을 만큼 존경스러운 젊은이들이지만, 멍청하고 괴팍한 부모로 인해서 피차 접근을 못하고 있다.
엘미르 역시 필요할 때 쓰임받고 다른 때는 무시된다. 그녀는 3막(따르뛰프가 그녀를 유혹하는)에서 등장하는데, 대사라야 고작 한둘밖에 안 되며 그것은 대부분 따르뛰프의 제안을 경박하게 대하는 내용이다. 그녀의 큰 대사는 4막에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따르뛰프의 가면을 벗기는 도구로서 역할한다. 이처럼 역이 고르게 배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그녀의 본성에 대해서 혼동이 야기된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그녀의 도덕성을 의문시했다. 그러나 몰리에르가 적당히 세속적이면서도 정숙한 여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작품 전체에 가장 고르게 배급되어 있는 역은 오르공이다. 세상에서 따르뛰프같은 인물들은 위험한 존재이겠지만 그들은 오르공 같은 반편들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사악한 자들의 번영은 어리석은 자들의 얇은 귀에 의존하는 것이다. 몰리에르는 따르뛰프의 계산된 경건을 강조하는 만큼 오르공의 충동성과 완고함을 강조한다. 오르공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유한 상인이다. 그는 한 가지 질물을 다각도로 심사숙고하지 못하도 행동하기 때문에 따르뛰프를 오판한다. 마침내 따르뛰프의 정체가 탄로될 때 오르공의 성격은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는 아직도 위선과 경건의 차이를 보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인군자라면 이젠 딱 질색이야. 이제부터는 지독한 경멸로 그들을 보겠고 악마보다도 더 나쁜 자들로 취급할 테야." 이렇게 그는 중립적인 위치로 돌아가는 대신 반대방향이긴 하지만 똑같이 과장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나이와 신체적 외모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다. 몰리에르는 그의 극단을 염두에 두고 극을 썼고 또 직접 연출했으므로 대본에다 모든 세부사항들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다. 따르뛰프 역은 불그레한 혈색의 거한 뒤크르와지(Ducroisy)를 위해 쓰여졌다. 이 사실 역시 분명히 익살의 여러 원천 중의 하나였다. 고행복, 채찍, 단식 등에 대한 따르뛰프의 모든 언사는 그의 뚱뚱한 몸집, 불그레한 건강미, 음탕한 성격 등과 상치된다. 오르공 역은 몰리에르가 맡았는데 그의 표정연기와 몸짓연기는 당시 이름나 있었다. 엘미르는 몰리에르의 아내가 연기했는데 그녀는 1669년 당시 27세였다. 뻬르넬르(Pernall) 부인 역은 남자가 했기 때문에, 따르뛰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과장된 비탄과 쾌락의 부정은 틀림없이 우스꽝스럽게 처리되었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중산층 또는 하층(신고전주의의 희극이론에 맞추어)에서 취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따분한 역은 아마 끌레앙뜨와 연인들의 역일 것이다. 관객들의 동정을 사게 창조되어 있으나 그들은 마치 마분지로 만든 인물 같다. 따르뛰프 역은 어렵고 이 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너무 악당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위협이 너무 크면 희극이 끊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연기하는 데는 오르공이 최상의 역일 것이다. 가장 길기도 할뿐더러 또 가장 탁월한 희극연기술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 역을 연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면, 오르공이 식탁 밑에 숨어서 따르뛰프가 엘미르를 유혹하려고 수작떠는 것을 엿듣는 장면 같은 것이다. 이 장면의 성공 여부는 오르공을 연기하는 배우의 고도로 숙련된 무언극적 연기에 크게 달려 있다.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따르뛰프』에서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방 하나면 충분하고 그것도 식탁 하나(오르공이 그 밑에 숨을 만한)와 벽장 하나(다미스가 그 속에 숨을 수 있는)만 있으면 된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장치나 도구를 특별히 사용하는 예가 없다. 행동은 계속적이거나 거의 그런 편이며, 단 하루 동안에 발생한다. 혹 연인들의 말다툼이 제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에피소드들은 작품의 본 주제와 직접 관련된다. 『따르뛰프』는 분명히 고전적 전통 안에 있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형식의 기존 개념보다는 연극적 필요에 따라 그의 기법을 다스렸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따르뛰프』는 지금까지 쓰여진 희곡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희곡의 하나로 계속 남아 왔다. 결함이 있지만 작품이 그것을 초월한다.
몰리에르 사후의 연극
몰리에르는 1673년에 죽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당시의 프랑스에서 배우의 신분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작가로서 대단히 흠모를 받았던 그도 연기자였기 때문에 많은 명예를 포기해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죽었을 때는 기독교장을 거부당했다. 후기 로마 시대에 발표되었던 배우에 대한 교회의 탄핵이 아직도 유효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직업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교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공연 중에 병이 들어 급사했다. 그는 일반적인 공식 절차를 받기를 거절했거나 또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루이 14세의 중재가 있은 후에야 몰리에르에게 기독교장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최소한의 의식으로 치루어진 약식장례였다. 이렇게 배우의 경제적, 법적 신분은 1673년까지는 많이 개선되어 있었으나 그는 아직도 어떤 의미에서 버림받은 자였다.
몰리에르의 사망 이후 프랑스 연극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코르네이유는 1674년에 창작을 포기했고 라신느도 1677년 이후 일반무대를 위한 희곡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 극작의 위대한 시기는 1680년까지는 이미 끝나 있었다.
1673년 이후 극장의 수효도 꾸준히 줄어들었다. 몰리에르가 죽던 당시만 해도 파리에서 다섯 극단이 공연을 갖고 있었다. 즉 몰리에르 극단, 오텔 드 부르곤뉴와 마레의 극단들, 이태리 배우들로 구성된 극단, 그리고 오페라단 등이었다. 1673년에 오페라 연출가였던 장-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 Lully)가 빨레-르와얄의 지배권을 획득하자 몰리에르의 극단은 마레 극단과 병합되었으며 1680년에는 이 병합된 극단이 다시 오텔 드 부르곤뉴 극단과 통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마지막 합병은 프랑스 연극사살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이것이 세계최초의 국립극장이었던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어느 연극단체보다도 계속적인 연극적 전통을 더 가깝게 구현하고 있다.
코메디 프랑세즈를 만들었던 명령은 또한 이 단체를 구속하는 법칙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단원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가 된 것이다. 배우들의 입단, 은퇴, 연금지불 및 기타 무수한 사항들에 대한 절차들이 확정되었다. 또 매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1680년 이후 얼마 동안 파리에는 세 극단이 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 오페라 및 이태리 코메디아 델 아테 극단 등이다. 1697년에 이태리 극단이 추방당하자(루이 14세의 둘째 부인이었던 마담 드 맹뜨농(Mme. de Maintenon)을 풍자하는 공연을 한 뒤에), 그 수효는 둘로 줄어들었다.
1672년에 오페라(단체명)에게 뮤지컬 드라마, 훈련받은 성악가, 여섯 개 이상의 악기, 또는 복잡한 춤과 스펙터클을 활용하는 기타 형식들에 대한 독점권이 부여되었다. 이태리 극단이 쫓겨난 후 코메디 프랑세즈도 대화연극에 대해 비슷한 독점권을 획득했다. 이렇게 17세기 말까지는 파리의 연극이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극단들이 단단히 보호받는 위치를 견지했으며 이들은 18세기 내내 일체의 잠식행위로부터 자체방어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프랑스 고전주의 시대는 프랑스 연극을 성숙시켰다. 그것은 세 명의 위대한 희곡작가들, 즉 코르네이유, 라신느 및 몰리에르를 배출해 내었고 이들은 그 이후 프랑스 연극의 으뜸가는 본보기로 계속 남았다. 불행하게 1650년과 1680년 사이에 도달했던 그 정점은 수세대가 지나도록 탈환되지 못했다.
오스카 G 브로켓, 김윤철 역, 연극개론, 한신출판사, 1989, P.259 ~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