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몰리에르
프랑스 연극은 1630년에서 1650년 사이에 크게 변했다. 그 전의 프랑스 연극은 유럽의 다른 나라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1620년대에 프랑스의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계까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리실, 대승정(大僧正)은 프랑스 문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자 우선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사살상의 프랑스 연극의 후견자로서 또한 통제자로서 연극을 통행 종교적 도덕적이 교시(敎示)를 꾀하기도 했다. 우선 리실의 대승정은 연극이 엄격하며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될 수 있으면 희극은 배제하고 그리이스 작가들처럼 철저한 규격에 맞춘 연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든 작가들은 삼일치법을 지켜야 한다고 교시했다. 리실의 대승정은 우선 프랑스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그 회원들로 하여금 연극에 대한 이론을 정립(定立)할 것을 명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 아카데미는 프랑스 연극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활발히 전개하여 연극계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연극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는 압력 단체로 둔갑했다. 옛 작품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고 연극의 다양화를 타락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이 당시의 연극을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연극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당시의 대표적 작가도 코르네이유와 라시느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코르네이유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르시드」는 공연에는 성공했지만, 프랑스 아카데미에 의해 그 내용이나 형식이 불만이라고 하여 심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17세기의 프랑스 연극은 역사상 신고전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낳게 했지만, 지나치게 그 형식과 교시 위주에 급급한 나머지 연극의 본질에서 어긋난 연극을 배출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몰리에르 같은 자유분방한 희극작가를 낳았으니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몰리에르는 극작가이기에 앞서 훌륭한 배우였다. 다른 작가들이 엄한 테두리 안에서 고전주의적인 작품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대중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활달한 희극을 쓰고 그 주연역(主演役)을 맡고 있었다. 대부분의 희극작가들이 그렇듯이, 그의 사생활은 비참했다. 극단을 경영하다 경영난에 몰려 빚을 지고 투옥되기도 했고, 가정생활은 우울했고 무대에서 숨을 거둔 외로운 작가였다. 그에게는 뚜렷한 연극론이 없었고 연극을 대중의 직시(直視)에 호소한다는 퍽 소박한 상식을 갖고 연극을 했다. 그의 상대는 대중들이었으나 그의 연극은 단순한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풍자를 통해 사회의 각계 각층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렇게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샀고 미움도 많이 받았다. 희극의 인물들은 유형적인 경우가 많지만 몰리에르의 인물들에게는 개성이 뚜렷했다. 악인도 대중으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주는 악인들이었으며 종막(終幕)에서도 그의 악인은 반성하지도 않았으나 관객들로부터 미움도 사지 않는다. 그의 희극을 하이 코메디-차원 높은 희극, 또는 개성의 희극(喜劇)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몰리에르는 그리이스의 아리스토파네스 이후의 최대의 희극 작가로 간주된다.
세계예술대백과 [연극], 도서출판아카데미, 1988, P. 90 ~ 91